책 몽유병자들은 헤르만 브로흐의 작품입니다. 헤르만 브로흐는 1886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나 섬유 공장을 운영하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고 사업을 이어받을 생각으로 섬유공학을 전공합니다. 하지만 곧 이를 포기하고 철학, 심리학을 공부합니다. 1910년부터 글을 쓰기 시작한 그는 오늘 소개해 드릴 몽유병자들을 계기로 중요 작가의 반열에 오릅니다. 유대교였던 브로흐는 나치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병합하자 탄압을 받았고 미국으로 망명을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20세기 초에 활동했던 중요 작가들을 꼽을 때 오스트리아의 헤르만 브로우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만큼 그는 문학사적으로 중요한 작가로 평가받습니다. 1931년과 32년 사이에 간행된 몽유병자들은 헤르만 브로어의 첫 장편 소설이자 대표작입니다.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저마다 다른 구성과 성격을 보여주고 있어 작가의 천재성을 고스란히 전해줍니다. 이 책은 제목이 무색하지 않게 마치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되지 않게 몽환적인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꽤나 복잡한 구성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적응되기 전까지는 진도가 나가기 어렵습니다. 독자들마다 인상 깊은 장면이라든지 감상이 다를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소설입니다. 이 글에서는 책 몽유병자들의 제목에 대한 의미와 책이 전하는 주요 주제, 삼각관계의 배타성에 대해 다뤄보겠습니다.
1. 책 제목 몽유명자들이 갖는 의미
이 작품의 제목은 몽유병자들인데 목류병의 사전적인 의미를 찾아보면 잠을 자다가 멀쩡하게 행동하고 다시 잠이 든 후 깨어난 뒤에는 이를 기억하지 못하는 병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의학적으로는 각성 장애라고도 불리는 이 병은 쉽게 생각하자면 각성 상태와 수면 상태를 관장하는 기능에 문제가 생긴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목을 반영하는 소설 속 3명의 주인공들인 요하임, 에슈, 후게나우로 그들의 이상과 살고 있는 현실 사이에 부조화, 불일치가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요하임의 경우에는 가족들의 압력으로 어릴 때부터 원치 않는 군 생활을 해야만 했는데 그의 삶이 시작부터 이상과 현실의 부조화 속에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에슈의 경우는 혁명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었지만 현실적인 장벽에 부딪혀 신문사를 운영하기 위해 이를 억누르고 나중에는 사상을 전향하기까지 합니다. 그런가 하면 나주에 나오는 지구 사령관이었던 요아힘의 신뢰를 얻고자 하지만 에슈에게 빼앗기고 에슈와의 갈등이 극에 달해 그를 죽게 만듭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살지 못하는 현실이 바로 이 작품의 제목을 목류병자로 할 수밖에 없는 결정적 이유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재현된 현실 속에서 자신의 이성을 쫓는 것과 그것을 생각하는 것은 현실에 대면하는 각성 상태가 아닌 목류 상태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머나먼 곳에서 자기 여인들 혹은 어린 시절의 고향만이라도 그리워하는 남자는 몽유를 시작한 사람이다라는 문장은 현실 외의 것을 생각하는 것은 몽유하는 것이라는 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삶을 실제로 현실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거의 있을 수 없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사실 우리 모두는 몽유병자이거나 몽유병자가 될 가능성을 가진 존재가 아닐까 싶습니다. 게다가 작가 헤르만 브로흐의 만연체를 읽어가는 과정 역시 마치 꿈속을 헤매는 듯한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던 것 같습니다.
2. 주요 주제인 가치들의 붕괴와 작가의 의도
이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주제는 바로 가치의 붕괴입니다. 작가는 총 3부로 구성된 이 소설 각장의 제목으로 주인공의 이름과 그들이 가진 사상의 이름, 낭만주의, 무정부주의, 즉물주의를 병기하고 있습니다. 이 소설의 주제 의식이 가장 명확하고 적나라하게 드러난 3부에서는 각 주인공인 요하임, 에슈, 후게나우가 모두 등장하는데 그들의 말로는 좋지 않습니다. 요하임은 심각한 부상을 당한 채 후송되었고 에슈는 후게나우에게 죽임을 당했으며 에슈를 죽게 만든 후게나우는 자금을 횡령해 잠적해 버립니다. 이들의 몰락은 각자가 대변하고 있는 사상 곧 가치의 붕괴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작가 헤르만 브로흐가 이런 주제의식을 좀 더 효과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활용한 소재가 바로 전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설의 막바지에서 도시는 공습에 의해 황폐화되는데 이 공습이 세 사람의 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작가는 작품을 집필하면서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참혹한 전쟁이 인간의 정신문명과 가치를 얼마나 붕괴시킬 수 있는지 보여줍니다. 하지만 전쟁이라는 비정상적인 상황 때문이 아니더라도 가치는 붕괴될 수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세대가 변함에 따라 각 시대에 중시되었던 가치들은 자연스럽게 퇴색하고 다른 가치로 대체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은 나이가 들며 자기 시대의 가치가 퇴색하고 대체되는 것을 보면서 이를 붕괴로 인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브로흐는 이런 경향을 사람이란 더 찬란했던 잃어버린 시절을 즐겨 회상한다는 문장으로 표현합니다. 또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은 이 소설의 3부가 전통적인 소설의 구성을 완벽하게 붕괴시키고 있다는 점입니다. 완전히 다른 등장인물들의 이야기가 불쑥불쑥 튀어나와 진행되는가 하면 시가 나오기도 하고 가치의 붕괴라는 소제목으로 논문 같은 글이 이어지기도 합니다. 마치 이를 통해 가치의 붕괴를 보여주기라도 하려는 듯 1, 2부까지 근근이 이어지던 전통적 소설의 구성은 3부에서 완전히 해체되는 것입니다. 내용뿐 아니라 형식을 통해서도 주제 의식을 전달하고자 하는 작가의 작법이 상당히 특이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3. 주인공들의 삼각관계의 배타성
이 3부작 소설의 세명의 주인공 요하임 에슈, 그리고 후게나우는 각자의 삶을 살다가 3부에서 조우하여 하나의 스토리를 만들어 나갑니다. 이들은 태어난 시대가 다르기 때문에 각각 다른 세대 사람들로서 젊고 패기만만한 후게나우와 달리 요하임과 에슈는 이미 자리를 잡은 기성세대입니다. 이들 중 보테지라는 신문사를 소유한 에슈와 이를 빼앗으려는 후게나우 간의 팽팽한 긴장감이 형성되는데 이들을 통해 인간이 갈등하는 원인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전쟁이 한창인 전선에서 이탈한 탈형병인 후게나우는 도시에 도착해 포도주 중개업을 하고자 신문사에 광고를 내기 위해 에슈를 찾습니다. 그러나 에슈는 농부들을 착취하려는 것을 용인할 수 없다며 이를 거부하고 그 이후 어찌 된 영문인지 후에 나오는 신문사에 대한 소유욕으로 불타게 됩니다. 후게나오가 왜 신문사를 가지고 싶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신문사에 대한 욕망은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는 요하임에게 찾아가 에슈를 모함하는 한편 지구사령관인 그의 후광을 등에 업고 모금을 해 신문사의 지분을 확보하는 데 성공합니다. 이 과정 자체가 갈등의 연속이었기 때문에 여기까지 보면 인간사회의 갈등 요소는 자신이 욕망하는 것에 대한 소유욕 때문인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후에 진행되는 내용에서는 소유욕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갈등의 양상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경영과 편집을 각각 나누기로 한 후게나우와 에슈의 통합은 어느 정도 성공적인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곧 또다시 갈등 상황에 놓인 것입니다. 그들은 앞다퉈 요하임에게로 달려가 그로부터 인정을 받으려고 하고 이를 통해 그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고자 안간힘을 씁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재미있는 점은 후게나우가 요아힘으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이유가 명확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미 신문사는 공동의 소유가 되었기 때문에 소유욕만으로는 더 설명할 수 없는 갈등 요소가 이들 사이에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부분이 삼각관계가 갖고 있는 본질적인 갈등 요소의 발현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삼각관계에서는 셋 사이의 관계가 마치 정삼각형처럼 균등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비교 심리에서 오는 긴장감이 형성됩니다. 이런 긴장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는 배타적 행동이 발생하게 되고 이를 어떻게 재어 억제하느냐가 중요해집니다. 요하임과 에슈 후게나우의 삼각관계는 제어가 실패했고 그 때문에 결국 파국을 막고 만 것입니다.
지금까지 헤르만 브로흐의 몽유병자들을 통해 생각해볼만한 요소들에 대해 살펴봤습니다. 몽유병자들은 세 인물 간의 관계와 심리에 대해 생각해 보며 읽으면 좋은 작품입니다. 작가가 전하고자 했던 주요 주제인 가치들의 붕괴의 관점에서 작품의 구성을 생각하며 작품을 읽는다면 더욱더 몽유병자들이 갖는 재미를 느끼실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