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책 아몬드 정상과 비정상의 사이에서 성장을 응원하다

by 우다다122 2024. 4. 7.

 

정상과 비정상에 대한 고찰을 담은 책 아몬드

헤르만헤세의 소설 데미안의 주인공 싱클레어는 자신이 살아가는 세상이 실은 두 세 개로 나뉘어 있음을 발견합니다. 그가 발견한 첫 번째 세계는 이른바 밝은 세계로서 사회가 정상이라고 규정한 다수의 세계를 가리킵니다. 이를테면 돈 버는 능력을 최고의 미덕으로 여기며 이혼을 인생의 오점으로 간주하는 세계로 사회가 못 박은 테두리를 좀처럼 벗어나지 않으려는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반면 싱클레어가 목격한 또 다른 세계는 어두운 세계로서 사회가 비정상으로 규정하는 세계이자 충동과 본능의 세계입니다. 쉽게 말해 이는 곧 사회적으로 권장되지 않는 소수자들의 세계로서 사회가 만든 규칙에 맹목적으로 복종하지 않는 모험가들의 세계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두 세계를 구분하는 주체가 무엇인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 책은 무엇이 한 세계는 밝은 세계로 또 한 세계는 어두운 세계로 규정하는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볼 여지를 만드는 책입니다.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우리 주변의 일상적 폭력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책 손원평 작가의 아몬드입니다. 소설의 주인공은 선윤재라는 이름의 어린 아이입니다. 소위 아몬드라 불리는 편도체가 선천적으로 매우 작게 태어난 윤재는 감정 정보를 처리하는 기능이 현저히 떨어집니다. 따라서 윤재는 무서운 것을 봐도 공포를 느끼지 못하며 남들의 불행을 보아도 전혀 공감하지 못하는 이른바 감정장애를 갖고 살아가게 됩니다. 다시 말해 윤재는 싱클레어가 발견한 어두운 세계인 사회가 비정상으로 규정한 세계에 속한 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 보니 윤재는 늘 어머니의 걱정거리였습니다.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들키는 순간 윤재가 떠안게 될 삶의 짐을 어머니는 그 누구보다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어머니는 매일마다 윤재에게 상황별로 적절한 말을 주입식으로 암기시킵니다. 윤재의 어머니는 어떻게든 윤재를 정상 세계로 편입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인물입니다.

정상 세계에 굴복하지 않는 초연함에서 비롯되는 성장

정상과 비정상이란 정의 사이에는 흥미롭게도 엄청난 위계질서가 존재합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비정상은 절대로 정상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비정상의 범위를 설정하는 권력 자체를 정상 세계가 쥐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령 역사적으로 아주 오랫동안 비정상이라 여겨진 성소수자들을 비정상이라고 박해하는 세력은 다수의 이성애자들이 살아가는 세계인 정상 세계입니다. 비정상 세계가 명확해질수록 정상 세계는 진실로 정상적이라는 당위성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정상인이란 정상인이기 때문에 정상인인 것이 아니라 비정상인이 아니기 때문에 정상인일 수 있다는 논리가 성립하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윤재의 어머니가 윤재를 교육시키는 모습은 표면적으로는 어머니의 따뜻한 사랑처럼 보이지만 실은 있는 그대로의 윤재를 인정하지 못하는 정상 세계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물론 세상의 모든 부모는 자기 자녀가 정상 세계에서 살아가길 바란다는 점에서 윤재를 교육하는 어머니의 모습은 무척이나 현실적인 서사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윤재가 계속 어머니 밑에서 자란다면 그는 끝내 정상 세계에 완전히 포획되어 자기 자신으로부터 멀어지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즉 윤재는 성장하기 위해 반드시 어머니와 이별해야만 합니다. 반면 작중 윤재의 할머니는 윤재에게 비정상이라서 낙인찍는 사람들에 대해 윤재가 특별하기 때문에 자신과 다른 것을 참지 못하는 사람의 특성 때문에 그러는 것이라고 이야기해줍니다.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을 비정상의 범주가 아니라 개인의 고유한 특성으로 인정해주는 모습입니다. 이처럼 정상 세계에서 남과 다르다는 사실은 차별의 마땅한 이유로 자리 잡습니다. 그러나 윤재는 이에 굴복하지 않습니다.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윤재는 정상 세계로부터 쏟아지는 온갖 비아냥에도 아무런 상처를 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 짐작할 수 있는 성장의 또 다른 요소는 바로 세상에 대한 초연함입니다. 예컨대 정상 세계는 우리에게 이렇게 살아야 한다 혹은 저렇게 살아야 한다라는 규칙을 끝없이 주문합니다. 만약 윤재가 그에 굴복하여 세상이 원하는 바에 적당히 맞춰 살아갔다면 보다 평화로운 삶을 살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은 곧 자기 자신으로부터 멀어지는 삶에 지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정상 세계의 규칙에 복종하지 않는 윤재의 초연함을 통해 비로소 성장의 길목에 들어설 수 있을 것입니다.

알을 깨고 나오는 성장을 응원하는 책 아몬드의 결말

소설 아몬드의 결말은 선천적으로 감정을 느끼지 못하던 윤재가 비로소 감정을 회복하는 외견상 감동적인 내용으로 끝이 납니다. 하지만 과연 이것을 진정 해피엔딩이라 할 수 있을까요? 성장 소설에 있어서 해피엔딩이란 말 그대로 주인공이 성장을 완성했거나 혹은 그에 준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윤재가 감정을 느끼게 된 사건은 성장의 완성이라 보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더 이상 윤재는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윤재 그 자체로서 긍정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윤재는 그저 남들보다 조금 작은 편도체를 갖고 태어났을 뿐입니다. 다만 사회가 윤재의 편도체를 비정상이라고 해석했을 따름입니다. 따라서 윤재가 감정을 회복하게 된 사건은 감정을 느끼는 것만이 정상이라는 사회적 담론에 마침내 윤재가 굴복한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다분합니다. 그러므로 보다 해피엔딩에 가까운 결말은 비록 윤재가 여전히 눈물 한 방울 흘릴 줄 모르는 무감정한 아이일지라도 그 자체로 윤재를 긍정해주는 사람들과 조화롭게 살아가는 모습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소설 데미안의 주인공 싱클레어는 그의 수호천사라 할 수 있는 데미안으로부터 다음과 같이 적힌 편지를 받습니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만약 알 밖의 삶이 전쟁이라면 어쩌면 우린 좁은 알 속에서 누리는 작은 평화에 만족하며 살아갈지도 모릅니다. 이를테면 사회가 정상이라고 규정한 규칙에 순종하며 자신의 신념이나 철학 따위는 포기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 입니다. 하지만 데미안는 단호히 말합니다. 알 속에 머무는 삶은 아직 태어나지 못한 삶이라고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진정한 자유의 삶을 누리기 위해선 고작 좁은 알 속에 허락된 안락한 평화에 만족할 것이 아니라 세상이 정상이라 규정한 알껍질을 과감히 깨부수고 마치 전쟁과도 같은 알 밖의 삶으로 기꺼이 뛰어들어야만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