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를 현대적으로 변형한 피그말리온 작품 소개
책 피그말리온은 조지 버나드 쇼의 작품입니다. 1925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이기도 한 조지 버나드 쇼는 1856년에 지금은 아일랜드의 수도인 더블린에서 태어납니다. 그의 아버지는 곡물 거래상을 했었지만 경험 부족을 극복하지 못하고 실패하는 비운을 맞게 됩니다. 그래서 버나드 쇼는 어린 나이에 일을 시작해야만 했습니다. 부동산 중개업소에서 격리로 일하던 그는 성인이 되자 런던으로 가서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초기에는 소설을 쓰기도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버다드쇼의 소설은 독자들에게 어필하지 못했고 결국엔 희곡 작가로 전환했는데 유명한 노르웨이의 극작가 헨리크 입센이 그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면서 영문학사를 논할 때 결코 빠질 수 없는 작가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우물쭈물하다가 내가 이럴 줄 알았다라는 묘비명으로도 유명합니다. 조지 버나드쇼의 대표작 중 하나인 피그말리온는 1913년에 발표되어 그의 오스트리아 빈에서 초연된 작품입니다. 그리스 신화 중 하나인 피그말리온과 갈라테이아 신화를 차용하여 당시 기준으로 현대적으로 변형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작가의 작품들 중 대중적으로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작품은 영화로도 제작되어 작가에게 아카데미상을 안겨주기도 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이 작품을 통해 교육에 대한 관점과 리자를 통해 본 인생의 의미에 대한 감상평을 공유하겠습니다.
교육에 대한 관점 자기 존중에서 시작3되는 교육의 본질
먼저 교육은 일방적인 것일 수 없다는 점을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조지 버나드 쇼의 대표작이기도 한 이 희곡의 제목은 그리스 신화를 따온 피그말리온인데 작가가 이를 제목을 한 것은 분명 의도가 있습니다. 우선 피그말리온 신화의 내용은 피그말리온은 키프로스 섬의 조각가였는데 아프로디테의 저주를 받아 문란해진 키프로스의 여자들에게 환멸을 느낍니다. 그는 도저히 키프로스의 여자들에게 희망이 없다고 느낀 것인지 상아를 조각해 실제 크기의 여성상을 만들어냅니다. 그 여성상을 사랑하게 된 피그말리온은 아프르디티에게 그 상을 살아있는 사람으로 만들어달라고 빌었고, 그 소원이 이루어지는데 그렇게 사람이 된 여성의 이름을 갈라테이아라고 했습니다. 버나드 쇼의 이 희곡의 기본적인 구성은 이 피그말리온 신화의 구성을 차용해온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피그말리온의 역할은 뛰어난 음성학자인 히긴스, 갈라테이아의 역할은 꽃 파는 여자인 리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히긴스는 그의 평가대로라면 천박한 영어를 하는 리자를 교육해서 상류층이 사용하는 영어를 하게 해 상류층처럼 보이게 만들고자 합니다. 결과적으로 상류층 사람들이 리자에게 완벽히 속음으로써 히인스의 목적은 달성되었다고 볼 수 있지만 그가 성공할 수 있었던 본질적인 이유는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히긴스의 일방적인 조련이 리자에게 있어서는 목적을 달성하는 데 큰 동력이 되지 않았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포인트에서 교육이라는 것의 특성을 하나 발견했는데 교육은 절대로 일방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교육이라는 것은 교육자가 원하는 상을 일방적으로 피교육자에게 강요할 수도 없고 강요해서도 안 된다는 것 입니다. 오히려 교육은 일방적인 강요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인 존중에서 시작된다는 점을 리자가 한 말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피커링으로부터 인격적인 존중을 받은 리자는 자기 존중을 시작했고 그것이 그녀에게 변화하고 싶은 동력으로 작용한 것이라는 점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지점이 이 작품이 신화와 가장 다른 부분이고 또 이 작품이 상당한 의미를 가지게 만드는 중요한 포인트라고 생각합니다. 갈라테이아는 상아에 불과했지만 리자는 분명한 인격체이고 교육을 받는 대상 모두는 상아가 아니라 인간이라는 점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이 작품을 통해 인격적인 존중이야말로 교육의 본질적인 조건이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인생의 주체는 자기 자신이다라는 작가의 메시지
다음으로 리자를 통해 인생은 결국 자기 스스로 개척해야 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의 초반부에서 히긴스는 리자와 힐 부인 가족들이 비를 피하면서 나누는 대화를 듣고 리자의 영어에 상당히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뛰어난 음성학자이자 언어학자인 그는 리자의 말만 듣고도 그녀의 출신과 사회적 계층을 금방 간파해냅니다. 그가 판단하기에 리자가 사용하는 영어는 천박한 것이었고 천박한 영어를 사용하는 한 그녀는 결코 신분 상승을 이뤄내지 못할 것이라고 보는 것 입니다. 이런 말을 볼 때 히긴스는 한 사람의 인생과 신분을 결정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로 그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는 듯합니다. 그래서 그는 리자에게 자신에게 배우면 상류층의 삶을 살 수 있다고 꼬득여 자신의 이론을 증명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습니다. 결국 리자는 사람들을 감쪽같이 속일 정도로 언어에 있어서 환골탈퇴하긴 했지만 그녀의 인생이 바로 바뀐 것은 아니었습니다. 히긴스와 피커링의 내기가 끝난 후에 리자는 자신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해 불안해했고 히긴스에게 물어봤지만 그에게도 해답은 없었습니다. 그는 리자에게 다시 돌아가 꽃을 팔든지 뭘 하든지 알아서 하라는 식의 무책임한 대답을 할 뿐이어서 리자를 분괴하게 만듭니다. 작가 버나드 쇼는 후일담을 통해 리자가 자신을 사랑하는 프레디와 결혼해 장사를 하며 살아간다는 결말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당초에 열린 결말의 구조를 가지고 있었지만 작가는 후일담을 통해 리자가 자신의 미래에 대해 스스로 결정을 내리고 선택했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이것이 리자의 결말에 대해서 버너드쇼가 독자들에게 말하고자 하는 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리자의 결말을 통해서 인생을 결정하고 바꾸는 주체는 결국 자기 자신이며 다른 누구 또는 어떤 조건이 인생의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님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결국 이 작품은 우리가 누군가를 대할 때 상대가 한 인격체임을 기억하고 그에 합당한 대우를 해야 한다는 점을 지속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